서울 봉은사의 역사와 문화유산
서울 강남 한복판, 고층 빌딩과 자동차 행렬로 가득한 도심 속에 자리한 봉은사는 눈에 띄게 조용한 울림을 전하는 사찰이다. 현대성과 속도감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봉은사는 전통과 정적의 힘으로 대조를 이룬다. 단지 유서 깊은 절이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불교 정신의 현대적 해석이 가능한 장소로서 봉은사는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신라시대 창건 이래, 수차례의 중창을 거치며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현재는 조계종의 도심포교 중심도량으로서 서울시민의 정신적 쉼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봉은사의 연혁, 문화재, 전각 구조, 그리고 그 철학적 의미를 중심으로, 서울이라는 도시 속 사찰이 가지는 문화적 특수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 봉은사의 연혁
봉은사는 신라 원성왕 10년(794년), 연회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견성사였으며, 이후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에 들어 ‘봉은사’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세조와 성종의 후원 아래 중창이 이루어졌고, 특히 성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봉은사를 왕실의 외호사찰로 삼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봉은사는 조선시대 유교 중심 사회 속에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번성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다수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점차 재건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불교가 탄압받는 분위기 속에서도 봉은사는 서울 도심에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핵심 사찰로 자리 잡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불교 정화운동과 함께 사찰 내부 개혁이 이루어졌고, 현대에 들어서는 1990년대 강남 개발과 더불어 서울 시민들의 대표 포교도량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사찰로서 수행, 교육, 문화, 포교의 다기능 중심지로 활발하게 운영 중이다.
■ 봉은사가 소유한 주요 보물·국보급 문화재 목록과 설명
봉은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다수의 귀중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819호)
조선 후기(18세기 후반) 조성된 목조불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과 좌우에 아미타불·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이목구비와 의상 표현, 신체 비례에서 조선 후기 불상 조각 양식의 정수가 드러난다.
봉은사 판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4호)
경전을 보관하던 건물로, 조선 후기 목조건축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촐한 구조 속에 정제된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현재는 불교 문헌 및 고판화 전시공간으로도 활용된다.
봉은사 석탑
봉은사 경내에는 여러 기의 석탑이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조선시대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단층 기단과 간결한 조각 표현이 특징이며, 서울 도심 속 전통석조 유산으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사리탑과 불사리 봉안유물
봉은사에는 수차례 불사리(佛舍利)가 봉안되어 왔으며, 이는 사찰의 종교적 정통성을 이어주는 핵심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조성된 대형 미륵대불 아래 봉안된 사리탑은 현대 불교에서의 성보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외에도 봉은사에는 다양한 불화와 탱화, 불교 의식구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현대적으로 복원 또는 전시되어 불자와 일반인 모두에게 공개되고 있다.
■ 봉은사의 건축물 구조 설명 (각 전각의 명칭, 용도, 상징성)
봉은사는 서울 강남이라는 도심 속 입지에 맞춰, 전통 사찰 구조와 현대적 공간 배치가 공존하는 독특한 건축 레이아웃을 지닌다.
진여문(일주문) : 사찰에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을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하는데 봉은사에서는 ‘진여문’이라고 한다. 진여(眞如)란, 사물의 있는그대로의 모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봉은사 진여문은 『선정릉지(宣靖陵誌)』의 「봉은사사적」에 의하면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기록되어 있다. 『선정릉지』는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 그리고 11대 왕 중종을 모신 정릉의 제향과 수호 및 운영에 관해 기록해 놓은 책이다.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찬시실(李王職贊侍室)에서 원본을 보고 베낀 필사본이 남아 있다. 필사본은 1925년 이왕직 장관을 역임했던 민영기(閔泳綺)가 작성한 것이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봉릉사찰이자 선종 수사찰인 봉은사는 진여문, 천왕문, 해탈문이 순서대로 늘어선 위엄 있는 사찰이었다. 그 뒤의 기록은 알 수가 없고, 1939년 대화재 때 판전을 제외한 대웅전, 동서승당, 진여문, 만세루, 창고 등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뒤 1941년 대웅전과 동서승당, 1942년 영산전, 북극전, 만세루, 천왕문 및 산문(山門)을 세운 것으로 기록되었다. 즉 이 때 진여문과 해탈문을 복원하지 못하고 다른 사찰처럼 일주문을 세운 뒤 1939년의 화마(火魔)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은 사천왕을 모실 천왕문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영암스님과 밀운스님이 주지를 이어 맡으며 진여문의 복원을 발원하여 1982년 일주문 자리에 진여문을 세웠다. 건축 양식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지만 일반 건물에 비해 기둥의 간격과 높이 등에서 훨씬 크게 지어졌기 때문에 칸수에 비해 실제로는 규모가 큰 건물이다. 가운데 대문에는 각각 칼과 창을 든 신중상이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좌우에는 1998년 법왕루를 신축하면서 헐려진 천왕문에 있던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0호인 봉은사 목조(木造) 사천왕 입상이 있다. 지붕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은 앞에는 ‘수도산 수선종 봉은사’라고 하여 봉은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뒤에는 ‘진여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봉은사라는 현판은 한때 해인사로 출가한 뒤 만해 한용운스님과 ‘만당(卍堂)’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서예가 청남(菁南) 오재봉(吳齋峯, 1908∼1991년)이 쓰고, 진여문이란 현판은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석주스님이 썼다. 옛 일주문은 1982년에 경기도 양평 사나사로 옮겨져 그 사찰의 일주문 역할을 하였다가 2000년대 중반에 사나사의 일주문 불사로 인해 봉은사의 옛 일주문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금강문 : 도량의 수호와 수행자의 의지를 다지는 의미를 지니며, 전각 입구의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대웅전 : 대웅전은 1982년 새롭게 중창되었으며 법당 안에는 2층 닫집을 짓고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는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부처님 등 삼존불(보물 제1819호 서울 봉은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모셨으며 후불탱화는 삼여래회상도가 안치되어있다.
대웅전은 새벽 예불부터 조석 예불이 항상 이루어져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신행 활동의 중심이다. 대웅전 전면 계단에는 왕실에서만 사용되는 용을 조성해 놓았으며, 기둥과 창호, 지분, 추녀의 모습과 용마루에 이르기까지 한국 전통 목재건축물의 아름다움과 자연친화적이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이다.에 점안식을 가졌다.
판전 : 판전은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며 1855년 남호 영기 스님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뜻을 모아 판각한 화엄경 소초 81권을 안치하기 위하여 지어진 전각이다. 후에 다시 유마경, 한산시, 초발심자경문, 불족인 등을 더 판각하여 현재 3,438점의 판본을 보관하고 있으며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특히 판전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마지막 글씨로 유명하다.
판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84호로, 판전에 판각된 화엄경 판본은 83호로 각각 지정 되어있다.
지장전/산신각 : 지장전은 주불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원을 이어 고통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중생들을 구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약초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워 ‘원력의 보살’이라고도 하고, 지옥중생들이 모두 구제될 때까지 지옥에서 함께 고통을 받으며 중생을 구하겠다는 서원을 세워 ‘악세중생의 부처님’이라고도 부른다.
지장전은 2002년 6월 불의의 화재로 전소되어 본래 12평이었던 전각을 40평으로 중창하여 2003년 12월에 점안식을 가졌다.
미륵대불 : 봉은사의 대표적 현대 조형물로, 현대 불교의 확장성과 시각적 상징성을 동시에 갖는다. 사찰 후방에 위치해 있으며, 그 크기와 위용에서 불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준다.
이처럼 봉은사는 전통 건축 요소와 현대 시설이 어우러진 공간 구성으로, 서울이라는 도시 환경에 적응하며 수행과 문화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 봉은사 건축물의 불교적·문화적 의미 분석
봉은사의 건축물은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하면서도 불교 사상의 정수인 ‘삼보(三寶)’—불(佛), 법(法), 승(僧)의 구조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대웅전은 부처를 상징하고, 판전은 법을 저장하며, 선원 및 스님 공간은 승가 공동체를 담아낸다. 이러한 배치는 불교 사상의 기본 구조를 시각화한 것이며, 방문자에게도 자연스럽게 체험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히 봉은사 미륵대불은 현대 불교에서 대중적 신앙심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사례로, 도시 불교의 새로운 접근 방식을 상징한다. 또한 지장전이나 산신각과 같은 전각은 민속신앙과의 융합을 통해 서울 시민들의 기복적 정서와 연결되며, 불교가 민간 생활과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봉은사는 도시 사찰로서의 기능을 고려해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다. 전통 사찰의 폐쇄적 공간 구성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명상·법회·전시·문화체험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현대 도시인의 삶 속에서 불교가 어떻게 자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 도심 사찰 봉은사의 문화유산으로서의 독자적 가치
봉은사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한복판에서 천 년 가까운 역사를 간직하며, 과거와 현재, 종교와 대중 사이를 연결해 온 보기 드문 도심 사찰이다. 송광사나 범어사처럼 깊은 산속에 위치한 전통 총림 사찰과 달리, 봉은사는 도시 생활의 한가운데서 정신적 공백을 채워주는 ‘열린 수행공간’이라는 정체성을 갖는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가치나 건축미를 넘어, 현대 불교의 실천성과 확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불교가 고립된 교단 내부의 수행을 넘어서, 시민사회 안으로 들어와 문화를 만들고, 사람을 치유하며, 사유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다.
봉은사는 이제 더 이상 전통 사찰의 모형만을 따르는 곳이 아니라, 도시인과 불교, 전통과 현대, 수행과 일상이 조우하는 교차점으로 그 존재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이는 곧, 21세기 불교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모델이다.